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은희·신상옥 납치사건 (문단 편집) == 북한에서의 생활 == 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북한에 끌려왔지만 비교적 환대를 받으며 생활했다. 최은희의 경우 [[남포항]]에 도착하자마자 '''[[김정일]]이 인사하러 직접 나와서 기다렸고''' 최은희를 보자마자 크게 반가워하며 [[악수]]를 청했다고 한다.[* 실제로 김정일은 상당한 영화광이었다. 학창시절부터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김정일 전용 상영관에서 영화만 줄창 볼 정도로 영화에 심취했으며 후계자 시절에는 영화 제작을 비롯한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강한 육성 의지를 드러냈다. 일설에 의하면 한국에서 나오는 영화는 물론 [[람보]]처럼 미국 영화들도 꽤 즐겼다고 한다. 당연히 신상옥과 최은희가 연출하고 출연한 작품들도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2007 남북정상회담]] 때는 이같은 김정일의 취향을 반영해 [[대장금]], [[겨울연가]] 등 남한 드라마와 남한 영화가 담긴 DVD를 선물로 줬는데 김정일이 매우 좋아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최은희는 정신이 혼미한 나머지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맡겨 악수를 했고 [[http://res.heraldm.com/phpwas/restmb_allidxmake.php?idx=71&simg=20180122091844AUI809_20180122092206_01.jpg|공식 사진]]도 남아 있다. 최은희는 주변에서 자꾸만 [[사진]]을 찍어대서 움찔움찔 놀라고 신경질적으로 찍지말라고 외치며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렸다. 신 감독의 경우에는 납치된 이후에 처음엔 배후를 북한이 아니라 [[중앙정보부|한국]]이라고 생각하여 [[박정희]]가 자신을 죽이려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신상옥 본인은 박정희와 친분이 깊었고 [[10.26]] 사건을 동료 죄수들에게 주워듣고 한동안 침울하기도 했을 정도였지만 영화인 모임에서 정부의 영화 정책을 비판했다가 그게 박정희에게 신상옥이 반정부 모임의 책동자라고 과장돼서 보고되는 바람에 박정희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고 격노했고 신필름의 허가도 취소해서 신상옥은 이미 이민이나 망명을 고려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미국으로 가려 했으나 외교부에서 비자 발급을 해주지 않으려 하자 무비자로 방문이 가능한 프랑스로 가서 다시 서독으로 피신할 계획까지 꾸몄고, 서독에서 이미 자리를 잡은 [[윤이상]]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리고 망명자금 마련을 위해 동남아에 자신의 옛날 영화 수출을 추진하고 홍콩 은행에 있는 예금도 찾을겸 홍콩에 돌아왔다가 납치됐다.] 자신을 납치한 것이 북측의 공작원들이라는 것을 알고 오히려 죽일 속셈은 아닐거라 여기고 여유있는 모습을 취하며 배 안에서 영화를 보는 등 공작원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누렸다. 북한에 끌려온 다음엔 [[벤츠]] 승용차를 탈취해서 [[청천강]]까지 달려간 후 정주 즈음에서 기차로 갈아타서 중국으로 달아나려 했지만 석탄간 위에서 꼬박 잠드는 바람에 기관사에게 들켜 끝내 잡히고 [[수용소]]에서 상당한 고생을 한다. 하지만 수용소를 나오자마자 다시 숙소의 [[군관]] 방에 숨어 2차 탈출을 시도하려다가 몇년이나 수용소에서 사상교화를 빙자한 [[고문]]을 당했고[* 하루에 열시간 이상 꼼짝도 안하고 정좌를 취하는 건데 한두시간도 아니고 몇시간이나 이런다고 생각해보면…] 큰 고생을 하곤 [[교화소]]로 이동했다. 거기선 대접이 좀 나아서 비곗덩어리도 제공되었는데 이웃 죄수들과 대화하는게 금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웃 죄수들과[* 말로는 [[월북]]한 국군 장병이라고 하는데 신상옥 감독은 이들이 자신의 의중을 캐보려는 보위부 첩자가 아닌가 의심하여 일부러 이들 앞에서 북한이 남북 체제 경쟁에서 이길 것이 틀림 없다고 북한을 찬양했다.] 수다를 떨며 정보를 얻다 걸려서 징계를 받는다. 눈에 띄게 형편없어진 식사에 저것들이 설마 나를 죽이려나? 싶어서 그들의 속내를 알아보기 위해 단식을 했다. 처음에 간수들은 그래봐야 당신이 손해다. 단식질 하다가 나중에 빌던 놈 많다, 나중에 그쪽에서 밥달라고 애원할걸?이라고 비웃었지만 6일을 내리 굶은 신상옥이 똥오줌을 싸고 기절하자 온 교화소가 발칵 뒤집혔고 정치보위부장[* 당시 명칭은 국가정치보위부였고 1982년에 국가보위부로 개칭된다.] [[김병하(북한)|김병하]]가 달려와서 "저 사람 죽으면 너희들도 죽는다!"라고 길길이 날뛰어 그를 의무실로 옮겨 그때부턴 잘 대우했다고 한다. 이후 김정일은 신상옥의 '반성문'을 접수한 다음에 그를 풀어주어 최은희와 재회하게 한다. 이후로 이들은 북한에서 재결합했고, 부부는 매우 대접을 잘 받아 최은희의 경우에는 납치된 직후에 '''심지어는 아무나 못 간다는 김정일 생일파티에 김정일 본인이 초대해줬다고.''' 당시 [[김정일]]은 [[북한]]의 공식 후계자로 아버지 김일성에 못지 않은 최고의 실권자였다. 당연히 김정일의 생일파티에는 북한에서도 엄청난 상류층이 아니면 절대 갈 수 없었다. 최은희의 감시원인 강해룡과 김학순은 자기들도 아직 못가본 자리라고 엄청나게 부러워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바로 이 자리에서 당시 7세였던 [[김정남(북한)|김정남]]과 [[성혜림]]까지 만났으며, 최은희가 김정남에게 이름이 뭐냐고 묻자 감히 자신의 이름을 묻는 사람을 처음 본 김정남이 몹시 부끄러워하면서 '''"남의 이름을 다 물어?"'''라고 중얼거리면서 꽁무니를 빼자 곧바로 김정일이 '''"어른이 말씀하시면 예 저는 누굽니다 이렇게 대답하는거야."'''라고 타일렀다고. 이렇게 환대를 받고 김정일과 가깝게 지냈다 해도[* 김정일은 42년생, 최은희·신상옥 부부는 둘 다 모두 26년생이다. 김정일이 한참 어리다. 띠동갑보다 더한 나이차…. --김정일이 영계! 혹은 영돈!-- ] 가족들이 [[대한민국|한국]]에 있는 마당에 억지로 끌려와서 경험하게 된 북한에서의 생활은 굉장히 힘들었다고 한다. 우선 탈출 우려 때문에 늘 [[도청(범죄)|도청]]과 감시를 받고 있었고 언제라도 자신들이 필요없다고 여겨지면 제거될지 모른다는 [[스트레스]]에 최은희는 이동만 시켜도 [[히스테리]]를 일으킬 정도였다. 또한 사상 교육과 개조를 한다며 주체사상과 김일성 교시 등을 교육시켰는데 이걸 수시로 받는것도 고역이었다. 최은희는 밤 11시에 [[대한민국|한국]]의 [[라디오]] 방송을 몰래 들었는데[* 이 당시 [[KBS 사회교육방송]]을 통한 라디오 대북방송이 송출됐는데 [[단파라디오]]의 특성상 북한에서도 남한의 라디오 전파 수신이 가능했다. 게다가 [[김씨 왕조]] 일가가 남한의 TV를 즐겨보기도 했고.] 자신의 실종 소식을 안타까워하는 라디오 진행자[* [[성우]] [[고은정]]이었다고 한다.]가 울먹이며 "언니, 어디 있어?"라고 하는 목소리를 듣고 수도꼭지를 틀고 서럽게 울었다고 한다. 이들은 북에 끌려온지 5년이 지난 후에야 김정일의 주선으로 재회하게 되는데 그들은 너무도 큰 충격으로 너무도 어색하게 서로를 쓸어안았다. 신상옥 감독은 만약 자기 배우들이 그랬으면 화 내면서 컷 외쳤을 동작이라고 했다. 파란만장했던 북한에서의 생활 때문인지는 몰라도 신상옥 감독이 자신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북한에 똑같이 끌려왔다는 것을 알게 되고서 모든 미움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고….[* "그럼요. 시간이 갈수록 더 그리워요. 요즘도 [[꿈]]을 많이 꾸는데, 항상 제 곁에 있어요. 촬영하는 장면이라든지…."(노배우의 목소리가 젖었다.)([[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1061701033630136005|#]]) ] 여차저차 하던 와중에 목적을 가지고 이들을 납치했던 김정일의 권유를 받고 전폭적인 지원 아래 북한에서 신필름 영화촬영소를 차리게 된다. 애초에 김정일은 문화, 특히 영화에 관심이 많아서[* 때문에 최은희, 신상옥은 김정일의 영화 아카이브를 접할 기회가 있었고, 지금도 떡밥으로 회자된다. 그 중 가장 큰 떡밥은 소실되었다고 알려진 [[만추]] 필름이 있더라는 떡밥.] 영화분야를 발전시키고 싶어 이들을 납치했다고. 재미있는 것은 한국에서 신필름이 허가 취소를 받은 지 얼마 안되는 시점에 신상옥 감독이 납북되었고 몇 년 후에 북한에서 신필름을 차리게 된 것인데 참 여러 가지로 영화같은 이야기. 사실 분단 당시에 많은 문화예술 인력들이 당대 연예인들이나 문화예술인에 대한 대우가 그야말로 형편이 없었고, 딴따라, 저급문화라며 차별을 받은 경험이 있어 공산주의 사상에 감화되는 경우가 많았고, 또한 북한이 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안정적이었던지라 인재풀 자체는 북한이 남한보다 더 풍부했다. 그러나 김일성이 차츰 차츰 권력을 강화했고 대중문화 부분에 있어서 그야말로 세세한 부분에까지 일일이 간섭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최승희]], 안막, [[임화]]처럼 정치투쟁에 휘말려 숙청된다든가 [[백석(시인)|백석]]이나 [[심영]]처럼 중앙에서 쫓겨나 지방으로 좌천당하거나 하방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또한 그 과정에서 소재제한도 강화되었는데 북한의 문화예술인들이 한직으로 내몰리거나 예술계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소재제한을 의식해 연극과 영화, 노래, 소설, 만화, 드라마 등을 만들었고, 결국 문화예술 부분으로는 형편없는 수준으로 전락해 있었다. 실상 따지고보면 남한도 영화나 만화, TV프로그램을 만드는데 이런저런 제약이 많았기는 했고 실제로도 대통령과 닮았다는 이유로 방송출연이 끊기거나, 배우들이 강제로 반공영화, 반공드라마에 출연시킨다 하는 등 온갖 말도 안되는 전횡들이 횡행하던 시절이었지만 국가에서 배우와 작가들의 일거리를 보장해주지는 않았기에 어떻게든 벌어먹을 방법을 찾아야했고, 또한 북한이 검열의 끝판왕급이었던지라 그나마 북한보다는 상대적으로 제약이 덜했기는 했다. 여하튼 북한의 김정일이 "공산주의 사회에서 노력하지 않는 북한의 예술 관련 인민들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력하고 경쟁하는 예술인들이 더 뛰어나더라"는 사실을 본인의 입으로 인정하게 된다.[* 신상옥, 최은희의 회고록에 따르면 김정일은 이렇게 발언했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지금 우리가 사회주의에만 국한시켜, 그저 사회주의에만 나가고 있어, 자본주의국가에는 마음대로 나갈 수 없습니다. (중략) 지금 딱 말하자면, 울타리 안에서 자기 것만 보고, 자기 것만 좋다는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중략) 인제 앞으로 10년 만에 못 따라가면은 인제 솔직히 말하면 세계적인 분포에서 보게 되면 우리 영화 예술이 낙후한 데서 아마 제일 낙후한 데서 1번이 되지 않겠는가..." (출처: 와다 하루키 (2014) <북한현대사>, p. 192~193)] --분명 깨닫기는 잘 깨달았는데 갈수록 더 막장을 만들었지-- 김정일은 대외 선전용으로 영화 예술의 힘을 빌리고 싶었으나, 북한 내부의 인력들은 수많은 제약에 길들여져 있고 이런 분야로는 워낙 인재가 없었기에 두 부부를 일찍이 점찍어 놓고 납북을 계획했다고….[* 최은희·신상옥 부부가 김일성·김정일과의 면담을 한 적이 있는데 최은희가 목숨을 걸고 카세트 플레이어의 녹음 버튼을 '''몰래''' 누르고 녹음한 육성이 있다. 들켰으면 어떡하려고….] 신상옥 감독과 한국 언론에서는 [[김일성]]에게 바치기 위해 최은희를 납북한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기도 했지만, 애초에 최은희도 이미 50대, 김일성 역시 칠순을 앞둔 노인이었다. -- 애초에 [[기쁨조]]가 있는데 뭐….--[* 다만 김일성은 김정일에 비해서는 그다지 엽색 행각이 드물었다고 한다. 그나마 알려진게 여성 [[안마사]]와의 사이에서 [[김현(북한)|김현]]을 낳은 것 정도밖에 없으니…. 게다가 사망하기 직전에는 김정일에게 '''"넌 주변에 여자가 너무 많아!"'''라고 꾸짖기까지 했다고.] 김정일은 오히려 최은희를 어머니 대하듯 깍듯하게 모셨으며[* 김정일은 생모 김정숙이 사망한 이후로는 어머니라는 존재 없이 살아왔는데 특히 계모 [[김성애]]와의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최은희를 어머니처럼 생각했을 수도 있다. 더군다나 북한의 최고 실권자라 할 수 있는 김정일이 하루가 멀다하고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는 최은희를 직접 어르고 달래느라 쩔쩔맸다는 점을 생각하면….] 최은희의 분위기를 편하게 만들기 위해 "최은희씨 저 난쟁이 똥자루 같지 않습니까"라며 ~~자기성찰~~ 개그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신상옥 감독에게는 '내가 최 여사를 아버지한테 바치려고 데려왔다는 소문이 돈다던데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이렇게 깨끗이 최 여사를 돌려드립니다'라고까지 했다. 그리하여 최은희·신상옥 부부는 북한에서 영화를 만들게 되고, 유럽 쪽의 영화제에 여러 편의 작품들을 출품한다. '돌아오지 않는 밀사', '[[탈출기]]', '[[소금]]' 등을 출품, 그 외에도 '[[춘향전]]', '[[불가사리(영화)#s-2|불가사리]]' 등 여러 작품을 김정일의 전폭적인 지원[* 특히 영화 '[[탈출기]]' 제작 과정에서의 일화가 유명하다. 신상옥 감독이 김정일에게 '[[열차]]를 폭발시키는 장면을 연출하고 싶다'고 제의하자, '그 정도는 어렵지 않다'고 대답하면서 '''진짜 열차를 폭파'''시켰다고 한다.([[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4100&num=44393|관련 뉴스]])] 하에 제작했다. 최은희, 신상옥 부부의 작품은 당대 [[북한 영화]]계 기준으로는 블록버스터급 작품이거나 참신한 영화들이었기에 북한 인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줌과 동시에 큰 인기를 얻었고,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도 흡족해할만큼 작품성도 뛰어난 작품들도 찍어서 해외영화제에서 상도 타게 된다. 최은희는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타고, 신상옥 감독은 감독상 타고… 이러던 와중에 [[런던]]의 영화제에서 한국의 영화배우 [[남궁원]]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일 덕분에 남궁원도 귀국 후 강도 높은 조사를 받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북한 측 감시원들에게 신뢰를 주고 훗날 계획해둔 [[탈출]]을 쉽게 하기 위해 남궁원에게 '''북한 체제 찬양과 김일성의 찬양'''을 했다고.[* 김정일과 최은희의 전화통화가 녹음된 육성 테이프에 의하면, 김정일은 최은희가 한국측 인사들과 만난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 다만 이걸 갖고 뭔가 의심을 한게 아니라 그냥 최은희의 안부를 묻던 도중 자연스럽게 그 부분을 언급한 것. 뭐 일테면 '그나저나 너님 일 끝나고 [[김희갑]] 만나기로 했다며 왜 안 봤음??' '기자들 우글우글하다보니 귀찮아서..' '하기야 기자들이 참 거지같은 종자들이지..ㅋㅋㅋ..' 뭐 이런 식의 대화였다고...] 이렇게 북한에서도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나갔다. 한편 한국 정부는 체제경쟁, 보도통제 등의 명목으로[* 이때는 [[막걸리 보안법]]이 현역인데다가 남북간 경제력 차이도 크지 않던 시절이었고, 또한 정통성이 떨어졌던 것까지 겹쳐서 북한과의 체제경쟁에 있어서 엄청나게 신경썼다. 북한에 지하철이 먼저 개통되었거나 컬러방송이 먼저 시작되었다는 것을 얘기만해도 코렁탕 먹었을 정도, 아이러니하게도 민주화 이후로 북한과의 경쟁에 별로 신경쓰지 않을때가 되면서 남북간 격차가 돌이킬수 없이 벌어졌다는 것은 유머이다.] 이들의 납북 사실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가 이들의 활동이 대외적으로 알려지게 되면서 납북 6년 후인 1984년 4월 2일에 와서야 이 사실을 공개하게 된다. 당시 세간에서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데, 한 시대를 풍미한 감독과 배우가 동시에 사라진 후 난데없이 북한에 있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지금 예를 든다면 박찬욱이나 [[이영애]]가 실종되었다가 6년만에 북한에서 잘 먹고 잘 산다는게 공개된 것이나 같은 일, 사실 [[박찬욱]]이나 [[이영애]] 이상으로 1960~7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신상옥 최은희의 비중은 컸다. 이 때 증거로 제시된 건 두 사람이 북한의 명소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과 육성 테이프 그리고 자필 편지였으며 당시 [[국가안전기획부]]는 북한이 미국 입양(혹은 유학)을 미끼로 신상옥의 두 아들을 해외로 유인 납치하기 위해 두 사람을 사주해 조총련과 연계된 일본인을 통하여 서울로 사진 등을 보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사실 그 일본인은 멀쩡한 교도통신 기자 에노키 아키라(榎彰, えのき あきら)로 신상옥의 지인이었으며, 우리는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북한에 살게 됐다는 암묵적인 언질까지 서울의 가족들에게 넌지시 전해준 상태였다.[* 참고로 북한에선 신상옥과 최은희가 자식들이 남한에 있는데 우리가 어찌 여기 살겠냐면서 되돌려보내달라고 하소연했는데, 이에 북한 측은 '''에이 겨우 그런게 문제면 언제든지 자식들 데리고 올 수 있는데 그런 쉬운 일로 걱정했냐?''' 라고 자식들까지 납치해주마 라는 역제안을 하는 패기를 보였다.] 즉 신상옥은 북한의 추가 납치 공작을 역으로 이용해 부부가 함께 납북되었음을 전세계에 공표한 셈. --이쯤 되면 무서운 사람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